미셸 트루니에의 책 『외면일기』에는 이런 문장이 나와요.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사이의 기이한 일주일은 시간 밖에 있는 괄호 속 같다. 지난해가 끝났지만 아직 새해는 시작되지 않았다.'
붕 뜬 한 해의 마지막 나날들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떤 기이한 일주일을 보내고 계실지 궁금해요. 저는 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후회하는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해를 돌아보며 새삼 깨닫고 있거든요. 다정한 사람들도 정말 많이 만났고, 오랜 꿈을 하나씩 이뤄가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일도 마음껏 했다는 것을요.
어떤 절망을 겪을 때는 그때의 허우적거림이 깊은 흉터로 남을 것 같았어요.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미화된 기억만 남았습니다. 이럴 거면 더 유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걸 말이죠. 새로운 절망 앞에서 태연하지 못한 순간이 오면, 이를 꼭 기억하는 것이 저의 내년 목표입니다.
편지를 처음 쓰던 날을 떠올려요. 단 한 명에게 보내는 편지라도 충분하다 생각했던 한여름 밤. 편지를 부치고 조마조마한 마음에 아주 오래 산책을 하며, 이 글이 어떻게 읽힐까 궁금했어요. 그로부터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저에겐 아주 기이한 반년이었는데요. 퇴사를 하고, 잠시 프리랜서도 되어보고, 알바도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쭉 지켜본 회사에 입사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 사이 저를 지탱했던 것이 이 편지였습니다. 오롯이 제멋대로인 저일 수 있던 글. 좋아하는 것을 꾹꾹 눌러 담아 보내는 일이 즐거웠어요. 그리고 그것을 매번 읽어주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다시 글 쓰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미술을 좋아하는 방식에도 확신을 갖게 되었고요. 모든 편지가 그랬듯 저는 앞으로도 전시장과 극장을 이리저리 산책하며 살아갈 것 같아요. 한없이 떠돌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을 만나면 사람들에게 전하면서요.
추운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전시가 있어요. 재작년 이맘때쯤 봤는데, 꼭 해가 지나기 전에 보고 싶어서 퇴근하고 무리해서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꼭 오늘 얘기하고 싶었어요.
전시 제목은 ⟪사랑은 타이밍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해 그 다음해 발렌타인 데이에 끝난 아주 달콤한 전시였습니다.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니 뎅- 뎅- 하는 종소리가 들렸어요. 권혜원의 영상 작품에서 흘러온 울림이었죠. 세상이 종말하는 소리였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세상이 멸망해요. 꽃은 지고, 태양이 가라앉는 그 순간에.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기를 택합니다.
이미 지난 타이밍 앞에서 최하늘의 두 조각도 사랑을 말하고 있었어요. 조금 떨어진 채로, 그러나 서로의 흔적을 몸에 새기고 다정히 서 있습니다. 꿋꿋하게 선 그들에게 종말은 들리지 않는 듯 했죠.
두 연인은 크기도, 굽이도, 재료도 다른 몸으로 서로를 마주봐요. 절대 어울리지 않을 연인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껴안았을 것이 분명한 손자국들. 연약하고 희미하지만 힘껏 사랑한 흔적이 영원처럼 남아 있었어요.
최하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제가 그의 조각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낭만적인 조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간이지만 영원이 될 그들의 종말을 지켜보며 저는 오래 속이 울렁였어요.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에서 마법사이자 엘프인 프리렌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아주 오래 전, 프리렌은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용사 일행과 10년의 긴 모험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그 시간은 정말 찰나에 불과했죠. 엘프는 영원을 사니까요. 천 년 이상을 사는 그에게 10년은 얼마나 작은 순간일까요.
용사 일행은 무사히 세계를 지켜내요.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등지고 이후의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프리렌은 나중에 또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헤어져요. 그가 돌아온 것은 50여 년이 지난 뒤. 용사가 노환으로 죽기 조금 전이었죠.
용사의 장례식에서 프리렌은 자신이 용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하염없이 웁니다. 같이 있던 것은 고작 10년 뿐이었는데 어떻게 알 수 있냐면서요. 그때부터 용사 힘멜을 이해하기 위한 오랜 여정이 시작돼요.
제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프리렌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말과 달리 찰나가 영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에요. 함께 한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지금을 이루는 많은 부분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이 세계엔 더 이상 힘멜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의지와 사랑은 다른 사람을 통해 계속 이어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분명 찰나에 불과할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조각을 이어 받고, 그것이 또 이어지면 영원이 될지도요.
수요일에는 양손프로젝트의 연극 '파랑새'를 봤어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배우들이 객석을 바라보며 말을 걸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혹시 어느 날 당신의 파랑새를 발견하면 그것을 자기들에게 줄 수 있냐는 물음이었죠.
집에 돌아가는 길. 저는 제가 갖고 있는 파랑새가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저에게도 분명 파랑새가 있을 텐데요.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자꾸 거대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아요. 그러는 사이 평범한 행복을 느끼는 것을 미루고 있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매일의 소소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했어요.
무언가에 푹 빠져들 수 있는 마음과, 같이 대화해 줄 친구들, 아무것도 아닌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언제나 믿어주는 가족들과 저를 바라보며 사는 고양이들. 좋아하고 싶은 것이 많은 세상도 은근 자주 찾아오는 행운들도 전부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조급하기보다 지금의 소중함을 깨닫는 연말을 보내려고 해요.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내일 더 이상 서로를 알아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일 이미 갖고 있던 행복을 알아채지 못해 놓친다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요.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의 소중함도 기억합니다. 매달 두 편의 편지를 쓰는 것이 솔직히 쉽진 않았는데요. 기억을 꺼내 한 글자씩 쌓아 글을 완성하는 과정은 행복했어요. 글을 좋아한다고 말씀해주시거나, 말은 하지 않아도 매번 열어주셨기 때문일 거예요.
오랜만에 출근하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렇게 바쁜 하루 속에서 종종 도착하는 편지를 꺼내 읽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긴 편지임에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었지만 편지의 어떤 부분들은 오래 이어질 하나의 찰나였길 욕심내 보아요. 제가 좋았던 순간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어느 곳에서 또 만나요! 만나야 한다면 또 만나게 될테니 긴 인사를 덧붙이진 않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
2023.12.29 금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