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가 필요한 계절이에요.
무탈히 여름을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더위보다 습도에 약한 편이라, 두 고양이와 축 늘어진 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느긋하게 매미의 한철 울음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하고요.
어릴 적 과학의 날 행사에서 지구온난화와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던 시간이 기억납니다. 아가미가 생기도록 진화한 인간을 그렸거든요. 당시만 해도 온난화라는 것이 멀게 느껴졌는데. 요즘 상황을 보면 하루하루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지나고 있는 듯 합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여름은 시원한 메론맛 아이스크림이기도 했지만 현실을 자각하는 일이 꽤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했어요. 더위처럼 덮쳐 온 현실이 버거워 한동안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서 한 여성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무너집니다. 한 존재가 아스라이 희미해지는 순간을 보는 저 역시 고통스러웠어요. 객석에서 정말 많이 울었고요. 그도 그저 사라져버리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짐 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살아가려 노력하죠. 그에 따라 수많은 점들이 움직이며 전과 다른 미래가 생겼고, 그 사이 새로운 심장박동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경이로운 소리였어요.
그러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절망스럽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뜨거워져도 늦출 수는 있고, 점점 늙어가는 내 작은 고양이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다 해도 아직은 사랑할 수 있고. 이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온 힘을 다해 지금에 머물 수 있을테니까요.
마냥 영원한 행복을 바랐던 어린 마음을 시간에 씻어 말리며 저는 그렇게 머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보내는 편지로는 조금 무거운 내용이었을까요? 하지만 속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요즘, 지금 머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안부를 전하고 싶었어요.
인스타그램 피드를 훑다 한 전시를 소개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익숙한 시계 이미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 - 완벽한 연인〉(1991)을 오마주한 것이었습니다.
두 시계가 같은 시각에 시작해 같은 시간이 흐르도록 나란히 놓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시계의 바늘은 점점 다른 각도를 그리기 시작해요. 그의 연인 로스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처럼, 간극은 넓어져 갑니다. 로스가 에이즈 판정을 받았을 때부터 토레스는 그들의 시간이 평행선을 그릴 것을 알고 있던 것 같습니다.
내 사랑에게. 1988
시계를 두려워하지 마.
그건 우리의 시간이었고,
우리에게 아주 너그러웠어.
우리는 달콤한 승리의 맛을 시간에 새겨왔고,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시간에 만나
운명을 정복했어.
우리는 시간이 만들어 준거야.
그러니까 때가 되면 그 공을 돌려주자.
우리는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어.
지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
토레스가 쓴 편지 위에는 두 개의 시계가 그려져 있어요. 이후 로스는 1991년에 사망했고, 같은 해 두 시계가 설치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기계적 심장박동이라 해석해요. 그의 말대로 시계는 연인과 생명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들의 시간은 흩어지지만, 매 전시마다 다시 맞춰지기 위해 애를 쓴다는 거예요. 심지어 토레스가 죽고 난 이후에도요. 같은 시각으로 맞추어 시작하는 것 역시 작품이니까요. 그렇게 사랑의 영원을 만드는 토레스의 방식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어떤 전시길래 이 시계로부터 출발하는지 궁금했어요. 기대처럼 사랑을 말하는 전시는 아니었습니다만. 우리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우리가 가진 시차에 대해서요.
전시 제목인 《시/차》의 중의성은 영어 제목에서 더 잘 느껴져요. 《Time/Perspectives》. 흐르는 시각과 우리가 보고 있는 시각. 모든 사람에겐 시차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얼마의 시차가 있을까요?
토레스의 멀어지는 시계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그곳엔 아주 오래된 도자기와 60년대 서울의 풍경, 그리고 2023년의 시선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동서양의 작품들도 거리감 없이 등을 맞댔고, 창밖으론 이태원의 소란한 풍경이 흘렀어요.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방금 전 헤드폰으로 듣고 있던 키린지의 노래가 전시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습니다. 어떤 공간의 분위기와 공명한다는 느낌을 받아보신 적 있나요? 그곳에 흠뻑 빠져들 수 밖에 없었어요.
어렴풋한 이미지로 묶인 작품들은 묘한 시차가 있었어요. 몇십 년 전 각자의 시선으로 골목길의 풍경을 바라본 박수근, 손상기의 작품이 담벼락에서 마주친 순간처럼 붙어 있었습니다. 담 안쪽으로, 그러니까 실내에 가까운 중앙벽에는 도상봉과 권옥연의 정물이 있었고요. 그뒤로 겸재 정선의 작품이 걸렸습니다.
바이런 킴의 하늘을 담은 일기는 널찍한 창 옆으로, 정말 하늘을 향해 걸렸어요. 커다란 김환기의 새는 낮게 날아가, 담벼락 위에 선 오윤의 까만 새가 되어 절 내려다 봤습니다.
이렇게 들쭉날쭉한 전시라니. 기획자는 서문에서 이 배치를 근본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좋았습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였으니까요. 당장 길을 걸을 때도 우연함이 굳이 겹쳐 희미한 풍경을 만들고 있지 않나요?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마주치지 않았을 것들. 과거와 현재,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 앞에 우뚝 선 전시 같았습니다.
누군가의 시선, 높이, 그리고 그와 나의 먼 세월의 흐름을 거닐며. 저는 어쩌면 우리는 같은 시간을 공유한대도 각자의 평행우주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예술은 다른 시간의 평행우주들과의 접점도 그릴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 제가 예술을 좋아하고 전시를 보는 이유일 것입니다.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이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다른 시차를 가진 우리. 이 편지는 얼마의 시차를 두고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 토레스의 시계처럼 계속해서 멀어지는 삶을 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또 우연히 잠시 겹쳐지는 때가 오겠지요. 한영수가 찍은 50년대 정동을 걷던 사람들과 제 포즈가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처럼요.
다시 시계를 같은 시각에 맞추는 양,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뻔한 우리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이 편지를 보내봅니다.
여전히 막연한 두려움의 내일이에요. 오늘도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일들에 절망합니다. 그래도 우리의 시계를 두려워 말고, 관대한 현재의 순간들을 만끽해 보아요. 시간이 가차 없이 느껴질 때는 다른 높이의 시야를 찾아보면서요. 의외로 꿈꿔온 풍경이 펼쳐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눅눅한 여름 앞에서,
2023.8.3 목요일 |